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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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에서도 인생에서도 그는 영웅이었다


테드 윌리엄스 Ted Williams가 원한 것은 최고가 되는 것뿐이었다. 물론 여기서 최고라는 것은 최고의 기술을 가진 선수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1941년 시즌 막판에 접어들어 윌리엄스의 타율은 무려 3할9푼 9리 55에 이르렀다. 통계학적으로 이 타율은 4할이었다. 윌리엄스의 소속팀인 보스턴 레드삭스는 이미 페넌트 레이스의 순위경쟁에서 탈락한 상태였으므로, 윌리엄스의 매니저인 조 크로닌Joe Cronin은 “지금까지의 타율기록을 유지하려면 앞으로 남은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와의 경기 때는 나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권유했다.

테드 윌리엄스는 존 언더우드와 함께 쓴 전기 『나의 타석 : 내 삶의 이야기 My Turn at Bat: The Story of My Life』에서 회상한다. "크로닌에게 게임에는 계속 출장할 것이고 만일 계속 안타를 치지 못한다면 4할 기록을 세울 자격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테드 윌리엄스는 결국 더블헤드에서 6안타를 기록하며 시즌 통산타율 4할 6리로 시즌을 마쳤다. 이 기록은 메이저 리그에서 마지막 4할 기록으로 남아 있다.

"4할 타율은 오랫동안 꿈꾸던 것이며 더욱이 나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수가 되고 싶었다. 사람은 게임에서뿐만 아니라 평생을 통해 바람직한 목표를 가져야 한다. 내 목표는 사람들이 '저기 위대한 타자 윌리엄스가 간다'고 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테드 윌리엄스가 희망하던 '위대한 타자'라는 말은 그가 2002년 7월 5일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로써 윌리엄스의 소망은 이루어진 것이다. 윌리엄스의 통산타율은 무려 3할4푼4리나 됐고 타격부문 6관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윌리엄스는 홈런 521개, 타점 1,839점으로 홈런 분야에서 메이저 리그 통산 14위, 타점 12위에 올라 있다.

테드 윌리엄스는 해병대 항공부대에서 조종사로 복무하느라 다섯 시즌 동안을 출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기록을 세웠다. 그러므로 군복무가 의무가 아닌 요즘 선수들과 비교하면 정말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윌리엄스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미국 내에서, 그리고 한국전쟁 때까지 총 39회나 전투비행 임무를 수행했다.

역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오른 명투수 밥 펠러 Bob Feller는 언젠가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윌리엄스는 내가 대적했던 선수 가운데 최고의 타자였다. 전쟁만 없었다면 윌리엄스는 아마 아무도 따라가지 못할 대기록을 작성했을 것이다."

할리우드 유명배우 마릴린 먼로의 전 남편이며 명예의 전당에 오른 외야수인 조 디마지오 Joe DiMaggio 역시 1991년 가진 인터뷰에서 "이 시대 최고의 타자는 역시 윌리엄스"라고 말한 바 있다.

윌리엄스는 1966년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1999년에는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한 20세기 최고선수만을 모은 메이저 리그 올 센트리팀의 일원으로 합류하기도 했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며 윌리엄스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성공비결에 관해 짧은 연설을 한 적이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위대한 타자투수는 아무도 없다. 행운도 좋은 선수로 성장하는 데는 그리 큰 작용을 하지 못한다. 오로지 끊임없는 연습만이 대선수를 만드는 비결이다.”

이런 이유에서 윌리엄스는 남들이 자신을 타고난 타자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했고 대신 "나만큼 타격연습을 열심히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하곤 했다. 타격에 대한 열정으로 윌리엄스는 야구에서의 타자의 역할과 타격의 비결에 대해 과학적인 연구를 했다. 그리하여 항상 온몸에 체중을 적절하게 분배하고 스윙을 할 때 손목의 이상적인 위치를 찾은 것이 타격의 비밀이라고 강조했다.

윌리엄스는 에드 린 Ed Linn이 쓴 전기 「테드 윌리엄스의 인생과 분투Hitter: The Life and Turmoil of Ted Williams」에서 "타자들은 흔히 공을 너무 세게만 치려고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팔, 손목, 손에서 자신의 힘을 100퍼센트 뽑아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윌리엄스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32~33온스짜리 가벼운 배트를 사용한 장타자였다. 이는 당시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여간해서 삼진을 당한 적이 없던 윌리엄스는 "배트가 가벼우면 오래 버티고 서서 투수가 던지는 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다. 따라서 변화구에 속을 확률도 줄어든다”고 말하곤 했다. 결국 윌리엄스는 타자로서의 본능과 최선을 다한다는 직업윤리를 극대화한 것이다.

린은 "천재들은 알고 있다. 아인슈타인도 모차르트도 그리고 테드 윌리엄스도 알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윌리엄스는 거울로 자신의 스윙 모습을 보며 상대 투수를 분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합 전 투수들이 워밍업을 할 때도 윌리엄스는 그 투수가 언제 공을 놓는지 등을 관찰하고 어떤 패턴으로 구질을 바꾸는지도 살펴봤다. 윌리엄스는 결국 투수들이 거의 본능에 가깝게 일정한 패턴을 두고 공을 던진다는 결론을 내렸다. 후에 윌리엄스는 "공한테이길 수는 없지만 투수보다는 한수 앞서 나갈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린은 "이런 면에서 윌리엄스가 공을 치는 데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상대할 모든 투수들이 어떤 구질을 가졌는지 알아보는 데 집착했다. 그 집착이 위대한 타자를 만든 것이다"라고 썼다.

윌리엄스는 심지어 시합 전에는 날씨까지 알아보았다. 구장에 도착해서 처음 하는 일이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살피는 것이었다. 같은 팀 동료였던 조니 페스키 Johnny Fesky는 이렇게 회상했다. “윌리엄스는 언제나 나에게 바람을 이용해 평범한 안타도 홈런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약한 바람도 10만 파운드(약 450톤)짜리 비행기의 항로를 바꿀 수 있는데 하물며 야구에서야 어떻겠느냐'라는 것이다."

윌리엄스는 또 언제나 자신이 공을 치는 장면을 상상하곤 했다. 투수가 어떤 공을 던질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처리할지 마치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생각한 것이다. "어렸을 때 집 뒷마당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야구를 어떻게 할지 생각하곤 했다. 물론 그 뒤 성인이 되어서도 이런 상상은 계속됐다."

타석에서 윌리엄스는 항상 신중했고 1938년 전설적 야구선수 로저스 혼스비Rogers Hornsby의 충고를 따랐다. 혼스비는 "좋은 공만 골라치라는 명언을 남긴 바 있다. 윌리엄스는 이 충고에 따라 2,019번의 출루기록을 가지게 됐고 그 중에서도 전타석 출루는 4번이나 된다. 최고 타율기록은 4할 8푼 2리로, 스트라이크가 될 공을 포수보다 정확히 육안으로 파악해 내는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 줬다.

이런 평가에 대해 윌리엄스는 "인간이 볼 수 있는 시각에는 한계가 있다”며 “나는 모래주머니를 통과해 먼지 속에서 날아오는 공을 보면서 선구안을 길렀고 고도의 집중력을 동원해 공을 고른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집중력으로 그는 1958년 40세의 나이에 메이저 리그 타격왕에 올라 타격왕 최고령 기록을 세웠다. 당시 타율은 3할8푼8리였다. 이와 같은 성적을 뒷받침하는 체력을 키우기 위해 윌리엄스는 많이 걷고 뛰는 것은 최대한 자제하면서 타격에서만 쓰이는 근육을 단련하려고 힘이 들지는 않지만 좀 특이한 자세로 하는 가벼운 운동을 즐겼다. 술과 담배는 평생 동안 멀리했고, 식사 조절은 물론 평소 잠자리에 일찍드는 습관까지 들였다. 린도 "윌리엄스가 그토록 오래 야구인생을 즐길 수 있었던 건 자기관리에 철저하며 한번도 비뚤어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야구경기 외에 윌리엄스는 다른 일에도 신경을 썼다. 상당히 오랫동안 소아암 환자들을 돕는 지미 펀드의 의장직을 역임했는데, 이것은 보스턴에 있는 지미 펀드 병원에서 소아암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단체이다. 윌리엄스는 암으로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위해 수천만 달러를 모으기도 했다.

게임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 날에도 윌리엄스의 내면에 도사린 강한 경쟁심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윌리엄스는 “아무리 잘하는 선수라도 운이 나빠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는 날은 있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안타를 하나도 치지 못한 날이면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라고 회상했다.

윌리엄스는 언제나 완벽주의자였다. “나는 진심으로 최고가 되고 싶었다. 경기장의 최고선수, 고교야구에서의 최고선수, 팀내 최고선수, 리그 최고선수가 되고 싶었다. 승부욕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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