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구레나룻, 가장 '베어스'다운 선수 김우열

귀여운 구레나룻, 가장 '베어스'다운 선수 김우열

귀여운 구레나룻, 가장 '베어스'다운 선수 김우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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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구레나룻, 가장 '베어스'다운 선수 김우열


 

'캐넌히터' 김재현의 홈런이 이대호나 김동주의 것보다 한층 짜릿한 쾌감을 주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의 작은 체구 때문이다. 뒤쪽에 포수가 일어서기라도 하면 그 그늘에 가려지는 작은 몸에서 휘둘러진 배트가 때려낸 총알 같은 공이 그 넓은 잠실구장 하늘을 건너 스탠드 중단을 직격하면, 마치 작은 대포가 불을 뿜는 장면을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프로 원년, 김우열의 홈런이 꼭 그랬다. 작달막한 키에, 꼭 웅크렸던 몸이 한 순간 무용을 하듯 활짝 펼쳐지면 '딱' 하는 만화적인 타격음과 함께 하늘 높이 치솟아 사라져가던 하얀 공.

 

아저씨들의 팀 OB 베어스야? 비어스야?


1982년, 프로야구가 개막되었을 때 그라운드의 주인은 '아저씨' 들이었고, 관중석의 주인은 '어린이'들이었다. 경기장 안에서는 배 나오고 머리 벗겨진 백인천과 윤동균, 김봉연이 묘기를 부렸고(그 많던 고교야구의 여성 팬들을 프로야구가 흡수하지 못한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경기장 밖에서는 팀 재킷을 맞춰 입은 초등학생들이 어린이 회원증을 꺼내들고 매표구 앞에 길게 줄을 섰다. 그러고 보면 그 뒤 삼십여 년간 그라운드는 젊어졌고, 관중석은 나이를 먹었다.

프로 원년, 여섯 개의 프로야구팀 중에서도 OB 베어스는 그야말로 아저씨들의 팀이었다. 우선 맥주 외의 다른 것을 떠올릴 수 없었던 구단모기업과 팀 이름(bear는 beer와 쉽게 구분되지 않았다)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는 배나온 윤동균과 털보 김우열, 계형철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동네 어귀 평상 위에서 러닝셔츠 바람에 맥주잔을 들고 불쾌해진 얼굴로 고래고래 노래라도 한 곡조 뽑을 것 같던, 그러나 고비마다 결정적인 홈런 한 방으로 마침표를 찍어주던 구레나룻의 서른세 살 아저씨 김우열은 OB 베어스의 상징이었다.

1968년,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곧장 제일은행에 입단해 실업무대로 진출한 그는 길고 길었던 김응룡의 독주를 끝내고 홈런왕의 계보를 이은 괴물 신인이었다. 그러나 1967년 봄 박정희 대통령의 시구로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가 개막되면서 시작된 고교야구 열풍은 실업야구가 열리는 경기장에 한기를 몰고왔고,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홈런 타자라는 전문가들의 격찬은 관중석에서 공허한 울림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1969년과 1974년 대통령배 실업연맹전 홈런왕과 1978년 실업야구대회에서 6게임 연속홈런의 진기록과 함께 따냈던 홈런왕 타이틀, 그리고 무수한 타점, 타격 타이틀. 그는 한국 야구사에서 가장 세련된 타격기술을 보여준 선수로 평가되기는 했지만, 그에 합당한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외롭게 1970년대를 지킨 그가 나이 서른 세 살의 은행 대리로서 삶의 안정을 찾아갈 무렵 프로야구가 개막되었다.

프로야구의 성공도 자신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어쨌든 그나마 성인야구에서마저 주무대를 빼앗기게 되는 실업야구의 존립은 난망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서른셋. 팀이나 선수 자신이나 몸 관리라는 개념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그 시절, 그 나이는 분명 적절한 은퇴의 시점이었고 그 순간 그에게 가장 적절한 자리는 분명 은행 창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택한 것은 프로 행이었다. 고민하는 후배들 앞에서 앞장서야 한다는 못 말리는 보스 기질이 발동했고, 한 세대를 홈런왕으로 풍미하면서도 아직 채워지지 않은 일말의 미련이 치받았기 때문이다. 스탠드를 가득 채운 팬들의 환호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그들 머리 위로 둥실 홈런공을 날리고 싶은 열혈남아의 뜨거운 본능 말이다.

 

박철순보다 앞에 있어야 할 이름 김우열


같은 팀에서도 잡티 하나 없는 피부를 가진 꽃미남 박철순과 신경식에 비하자면, 깊은 풍상의 흔적이 엿보이는 검붉은 얼굴에 길게 기른 구레나룻, 체구는 작았지만 그의 얼굴만큼은 위압적이었다. 그러나 빠른 직구를 노리고 팽팽하게 당겨졌던 근육의 긴장을 배신하는 슬로커브에 당해버리는 순간, 어린 아이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깡충깡충 뛰면서 아쉬워하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했다.

게다가 크게 헛스윙을 하다가 헬멧이라도 벗겨지면,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허겁지겁 주워 챙기는 손길 사이로 훤히 드러나던 머리의 맨살들. 그래서 언젠가는 외야 수비 중에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모자가 벗겨지자 날아오던 공 대신 모자를 쫓아가며 장타를 헌납하는 엽기를 선보이기도 했던 것이 그였다.

시간이 멈춰지는 듯했던 그림 같은 홈런 스윙. 그러나 그 그림을 뚫고 불쑥 튀어나온 슬랩스틱 코미디의 한 장면 같던 익살. 그의 야구는, 밑도 끝도 없이 심각한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다가 또 맥락도 없이 썰렁한 농담을 쏟아놓으며 너털웃음을 참지 못하는 동네 슈퍼마켓 앞의 아저씨의 인생 그대로였다.

원년 전기리그 40경기에서 18승을 한 방패였다면, 같은 기간 무려 11개의 홈런을 뿜어낸 김우열의 방망이는 가장 날카로운 창이었다. 그 방패와 창의 힘으로 베어스는 그 40경기 중 29번을 승리하며 전기리그를 우승했고, 일찌감치 한국시리즈의 한 자리를 예약할 수 있었다.

그 해의 한국시리즈는 계단도 오르내리기 힘든 허리부상을 숨기고 출격해 두 번의 세이브와 최종전 완투승까지 올린 박철순의 투혼,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결정적인 만루 홈런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한 김유동의 무대로 기억된다. 그러나 정작 한 순간의 호흡이 가름하는 그 민감한 승부의 갈림길에 있었던 것은 김우열이었다.

1승 1무 1패로 팽팽하게 맞선 베어스와 라이온즈의 한국시리즈 서울 4차전. 장태수의 선제 투런 홈런을 시작으로 4회까지 이미 너 점을 허용한 베어스는 점차 힘이 빠지고 있었다. 박철순의 부상이 예사롭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던, 그리고 2차전 직후 대구에서 이광환 코치를 필두로 김우열, 윤동균, 유지훤, 이홍범 같은 고참 선수들이 술을 마시고 현지의 주먹들과 벌였던 난투극으로 한 구석에 몰려 있던 베어스 선수들이 하나 둘 한숨을 내쉬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그 경기 4회 초 솔로 홈런으로 추격의 발판을 놓았던 김우열은 동점으로 맞서던 7회초 투아웃 주자 2·3루 상황에서 마운드 위로 높이 치솟는 플라이 볼을 띄웠고, 공만 보며 마주 달리다 부딪친 황규봉과 이만수 옆으로 떨어진 행운의 '충돌안타'는 그대로 결승타가 되었다. 먼저 올린 2승, 한국프로야구 첫 번째 우승자를 가리는 결전에서 승자 베어스와 패자 라이온즈를 가르는 순간이었다.

물론 고질적 무릎 부상과 급격히 저하된 시력 때문에 그의 프로생활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서른여섯을 넘기던 1985년부터 급격히 떨어진 타율과 홈런 페이스는 끝내 반등하지 못했고, 1986년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를 거쳐 1987년 시즌 뒤 쓸쓸히 방출되며 그의 무대에도 막이 내려졌다. 친정팀 베어스와 신생팀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기도 했지만 그 역시 평탄치는 못했다. 동기생 윤동균과 겹치는 궤적에서 번번이 밀려났고, 투박한 지도 스타일은 팬과 후배들에게는 몰라도 구단주를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10년을 지배할 만한 재능을 타고 났지만 무대는 그 10년을 모두 지내버린 뒤에야 허락되었고, 감독으로서 혼돈의 그라운드에서 승리를 엮어내기에는 그의 피가 너무 뜨거웠으며, 그의 얼굴이 너무 낭만적이었다. 그래서 그의 아름다운 스윙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따금 기록지에 적힌 턱없이 적은 홈런 수, 그리고 생각과 달리 초라한 지도자로서의 이력에 놀라기도 한다.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골목길을 십년 후 다시 걸을 때 느끼는 당황스러움처럼 말이다.

강했던 사자와 호랑이, 세련됐던 청룡. 그 한 편에서 엉뚱한 듯 화려하면서도 소탈했던 뚝배기 맛의 매력을 풍겼던 맥주집 곰, 베어스. 그 팀을 떠올리며 제일 먼저 새겨지는 이름이 박철순에 앞서 김우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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