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싸움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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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싸움(석전)


 

안동(安東)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 16일에 중계(中溪)에서 석전을 벌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풍속에 "매년 정월 16일에 부내에 사는 사람들이 중계를 사이에 두고 좌우편으로 나누어 돌팔매질로 서로 싸워서 승부를 결정한다”는 기록이 있다.

김해(金海)에서는 해마다 4월 8일과 5월 단오날에 석전을 해서,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풍속에 "매년 4월 8일에 아이들이 떼로 모여 성남에서 석전을 하고 단오가 되면 젊은 장정들이 어울려 모여 좌우로 편을 갈라 깃발을 세워 북을 치며 고함을 지르고 사납게 날뛰면서 돌팔매질을 하는데 마치비가 오는 것 같다. 결국 승부가 나고서야 끝이 난다. 비록 사상자가 나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수령도 금지시킬 수가 없었다”고 했다.

경주(慶州)에서도 해마다 정월 보름날 석전을 행하였는데, 《졸옹집(集)》에 석전(石戰說)이 있다. "작년에 영남지방을 돌아보고 경주 땅에 이르렀었다. 때는 정월 중순이라, 달 밝은 밤에 소리가 있어 길거리가 시끄러웠다. 다투는 듯하고 싸우는 듯하여 새벽이 되도록 아직 그치지를 않았다. 그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이 고장 풍속에 석전이 예부터 있단다. 이 고장 사람은 해마다 정월 보름날이면 좌우로 편을 나눠 서로 겨룬다. 손에 돌멩이를 쥐고 싸우되, 숱한 돌멩이가 뒤섞여 던져지니 비가 쏟아지듯 퍼붓는 가운데 자웅을 결판낸다. 달이 지새는 무렵을 한정해서 비로소 그치게 된다. 이기면 그해 일년 재수가 좋고, 지게 되면 그야말로 나쁘단다.

이 싸움에 힘써 끝끝내 버티는 사람은 일년 재수를 점치는 마음에 사로잡힌 까닭이다. 이 싸움에 당하게 되면 돌멩이를 단단히 손에 쥐고 기력을 내서 용감무쌍해진다. 숨소리 거칠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마치 미치광이가 날뛰듯 한다. 하지만 돌을 던지는 데 있어서는 남보다 반드시 먼저 하고, 남보다 뒤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자식으로서 그 아비한테 팔매질하고, 아우로서 그 언니한테 팔매질하고, 친척으로서 그 일가한테팔매질하고, 이웃으로서 그 이웃한테 팔매질을 한다. 다만 나와 적이 있을 뿐, 이미 갈라져서 어떻든지 상대방에 덤비어든다. 그래서 내가 힘차게 저쪽을 이겨서 우쭐해지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히 머리통에 피가 젖고 살결이 찢어지고 뒤통수를 발길로 채어 정신을 잃고 넋이 빠져버리기도 한다. 그렇건만 나중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의기양양해서 말하기를 내가 이겼다고 한다. 이로써 자기는 금년엔 재수가 좋다고 판단하고 조금도 근심이 없게 된다.

고약한 병도 안 걸린다는 것이다. 자식으로서 팔매질한 사람은 말하기를, 감히 아버지한테 돌팔매를 했으랴, 싸움이기에 돌을 던진 것이니라. 아우로서 팔매질한 사람은 말하기를, 감히 형한테 돌팔매를 했으랴, 싸움이기에 돌을 던진 것이니라. 친척으로서 팔매질한 사람은 말하기를, 감히 친척한테 돌팔매를 했으랴, 싸움이기에 돌을 던진 것이니라. 이웃으로서 팔매질한 사람은 말하기를, 감히 이웃한테 돌팔매를 했으랴, 싸움이기에 돌을 던진 것이니라. 아버지와 형 된 사람은 또한 말하기를, 아들이나 아우로서 구태여 나를 겨눠 돌을 던진 것이 아니요, 싸움이니라. 나또한 일찍이 아버지한테 돌을 던졌었고 형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었는가. 친척과 이웃 사람도 또한 말하기를, 저쪽이 구태여 나를 겨눠 돌을 던진 것이 아니요, 싸움이니라. 나도 일찍이 친척을 향해 돌을 던졌었고, 이웃 사람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사람은 풍습이 몸에 배어 그 전하는 바가 유구하며 스스로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윤리를 무시하고 풍교를 손상한다는 것을 모른다. 오호라, 일년의 길흉이 그다지 요긴할쏜가."

또한 평양(平壤)이나 각 지방에서도 이 편싸움 놀이는 우리나라 특유의 풍속으로 상당히 성행했었다.

헐버트(H. B. Hulbert)의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에 석전을 보고 느낀 기록이 있다.

"한국에서는 석전과 같이 그들만이 즐기는 놀이가 있다. 한국인들이 중용(中庸的)이고도 남에게 해를 끼치는 짓이란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 놀이는 좀 변칙적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야구를 즐기는 만큼 한국인들이 이 위험스러운 놀이를 그렇게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는 음력 정월을 이곳에서 지내어보는 수밖에 없다.

이 편싸움(석전)은 오직 정월에만 즐긴다는 사실은 놀이의 시간성을 지킨다는 점에서 한국보다 더 철저한 민족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석전, 연날리기, 돈치기, 수영, 팽이 등은 특히 그것을 즐기는 계절이 있다. 석전이 오직 정월에만 열리는 것은 그때만이 밭에는 아무 것도 심지 않아서 그 놀이를 즐길 수 있는 넓은 터를 얻기가 쉽기 때문이다. 겨우내 조그마한 초가지붕 밑의 갑갑한 방구석에서 3개월 동안을 꼬박 갇혀 있다가 보면 그들이 느끼는 봄의 감촉은 비교적 넓은 집에서 살고 있는 미국인들보다 훨씬 더 매혹적이다. 동면하던 그들의 근육은 활기를 되찾게 되므로 밖으로 나와 언덕에서 뛰어놀거나 가슴을 풀어헤치고 그 동안 움츠러들었던 기운을 발산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같은 마을의 주민들끼리라도 패를 갈라서 석전을 할 수도 있지만 흔히 이웃 마을끼리 편이 되어 도전기(桃戰旗)를 휘날리며 싸움을 걸어온다. 그들은 울타리가 없는 빈 들판으로 쏟아져나가는데 어떤 사람들은 두터운 장갑을 끼고 무거운 철모로 무장을 하며 한편에서는 단순히 돌을 던지기만 한다. 양편의 대장들은 장갑 낀 주먹을 휘두르고 상대편을 모조리 때려죽이기라도 하려는듯이 씨근거리며 거만스럽게 자기 패의 앞으로 나와 선다. 돌이날기 시작하면 대부분은 돌을 막지 못하여 쓰러지며 나머지는 교묘하게 돌을 피한다. 두 패에서는 서로가 심한 욕설로 상대편을 비방하여 사기를 돋우고 싸움이 절정에 이르게 되면 그들은 사나웁게 상대편으로 돌진하여 더 많은 돌을 던지고 대장은 더 크게 뽐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는 동안에 흰옷을 입은 수많은 비전투원(非戰鬪員)들은 언덕에 둘러서서 자기가 좋아하는 패에게 응원을 보낸다. 이때 대장들은 머리와 어깨에 돌로 맞는 소리를 퍽퍽 내면서 점차로 접근하며, 그러는 동안에도 그들의 머리 위로는 더 많은 돌이 날아온다. 그때에 갑자기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함성이 한편에서 일어나며 억세게 밀기 시작한다. 반대편은 뒤로 물러서며 승리가 결정된 듯이 보이지만, 곧 처음에 추격하던 패의 정렬은 도망하던 쪽으로 넘어가서 반대로 밀기가 시작된다. 이때 자기 패에게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뒤로 처지는 사람은 매우 운이 나쁘다. 서로 밀고 밀리고, 흥분한 관중들은 땅이 꺼질듯이 소리치며, 먼지는 구름처럼 하늘을 덮고 어떤 녀석들은 쓰러지고, 전에는 이만 반짝거리던 입을 엄청나게 벌리고 욕설이 끊임없이 쏟아져나온다. 이때의 흥분은 마치 스페인의 투우의 경우와 마찬가지여서 얼마가 지나면 그와 같이 격렬하던 감정도 참가자나 구경꾼이나 다함께 풀어진다.

한 철에 이러한 접전이 벌어지면 서너 명씩은 죽게 마련이지만 너무 싸움이 격렬하게 되면 경찰이나 헌병이 개입하는 것 같다. 싸움이 심한 때에는 집이 무너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에는 팔에 타박상을 입고 머리가 깨지고 욕이나 한없이 퍼붓는 정도로 그친다."

그러나 이 놀이는 돌팔매질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육박전이 벌어져 몽둥이로 서로 때리므로 사람이 죽고 상하는 까닭에, 고려 때와 조선시대에도 번번이 금지시켰었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서울 사람들의 석전(편싸움)을 금지하였다. 서울의 옛날 풍속으로서 정월 상순에 남문 밖이나 5강의 아래 위에 모여서 편을 갈라 돌팔매로 싸우고 승부를 겨룬다. 사상자가 나오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다. 이것을 편전(편싸움)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10여일 동안 해산하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당국은 우리가 무예를 연습하는 것을 꺼려서, 헌병을 파견하여 엄금하였다. 그러나 끝내 중지시키지 못하였다. 그래서 당국은 발포 사격해서 억지로 해산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계속되어오다가 당국에서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금지하여 결국 편싸움이 자취를 감추게 되고 말았다.

행인(杏仁) 이승만(李承萬) 화백의 《풍류세시기(風流歲時記)》 가운데 서울의 편싸움을 직접 목격한 대목이 있다.

“내가 직접 관전할 수 있었던 편싸움은 서대문 밖 녹개천에서 어울린 삼개麻浦패와 만리동 패거리의 편싸움이었는데, 기실나의 10대 시절만 하더라도 서울에서의 편싸움은 벌써 그 명맥이다할 때였다. 그날 싸움판은 녹개천을 사이에 두고 쌍방이 팽팽히 맞섰는데 양편 앞머리에는 모두 올망졸망한 개구쟁이 때를 못벗은 사내애들이 한몫 자리값을 톡톡히 하고 늘어섰었다. 그 뒤켠으로 젊은 장정들이 줄지어 섰는데 머리에는 모두 벌벙거지(솜모자)를 눌러쓰고 몸을 날렵하게 단속하느라고 두루마기 앞섶 양쪽을 둘둘 말아올려서 양귀 주머니 속에 틀어넣었는데 그때에는 이것을 가리켜 '날개를 튼다'고들 하였다.

이들 젊은 장정들의 한쪽 손에는 제각기 보기에도 실한 육모방망이 하나씩을 꼬나들었다. 그들 중에는 미리 준비해 가지고 온 물매끈이나 바지대님을 끌러 여기에 돌멩이를 친친 말아동이고 연방 팔쭉지를 앞에서 뒤쪽으로 돌리면서 원을 그려 돌팔매질을 하였다. 그러면 이편 저편 할 것 없이 여기저기서 '아이쿠'하는 비명이 꼬리를 물고 터져나오곤 했다. 이런 난장판에 뛰어들었다가 어느 놈이 던진지도모를 돌멩이나 방망이에 맞아 박(이마빡)이라도 터져 죽어도 이판에 '살인 없다'는 말이 그대로 실감나게 한다. 이처럼 한바탕 싸움판이 잘 어우러져서 한창 판을 돋는 판국에, 난데없는 왜놈의 기마헌병들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금세 싸움판은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기세가 꺾여들어 기마헌병들이 불어대는 호루라기와 내두르는 총검에 쫓겨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싸움꾼이 달아나기 시작하자 어이없게도 싸움판은 파장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왜병의 제지와 금령에 묶여 서울의 편싸움은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이다.

서울 동남쪽 근교의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松坡里)는 1963년 1월 1일자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현재는 송파구 송파동인데, 이 송파의 세시풍속(歲時風俗)으로서 '장꽁'이라는 놀이가 있어 이 놀이가 격해지면 편싸움(石戰)으로 발전된다고 한다. 김명자(金明) <송파의 세시풍속> 조사보고에 의하면, '장'이라는 놀이는 나무토막을 주먹만한 크기로 깎아 길에 놓고 막대기로 사람을 겨냥해 치는데 규칙도 없이 무지막지하게 쳐서 상대편집마당까지 쫓아가서 항복을 받으면 끝나지만, 워낙 놀이가 격해서 편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편싸움은 정월 보름날 횃불놀이를 하다가 놀이가 격해지면서 시작되는 수도 많았는데, 오봉산(五峰山) 주변에서 돌멩이를 던지며 격렬하게 행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와 똑같은 석전(편싸움) 방식은 아니지만, 돌팔매로 놀이하는 풍속이 중국과 일본에도 있었다. 돌팔매질을 중국에서는 포타(抛堉)라 쓰고, 일본에서는 인지우지(印地打)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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